중년의 하루

국립오페라단 잔니 스키키 후기 | 부천 수피아 카페·당근모임까지 하루

여여한 일상 2026. 5. 10. 07:30

 인연은 당근처럼, 인생은 오페라처럼

🌿 부천호수식물원 수피아: 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성인 3,000원(부천시민은 1,500원), 청소년·군인 2,000원, 어린이 1,000원

 

 

어제는 사람도 만나고, 예술도 만났다.

문득 앞으로 내게 남겨진 시간을 슬쩍 들여다본 듯한 하루였다. 

 

오전엔 부천 상동 호수공원 식물원 안 카페 ‘수피아’에서 당근방 언니를 만났다.

 

식물원 카페 창밖으로 연두색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언니는 앉자마자 사람들 이야기를 꺼냈다. 누가 서운했는지, 누가 방을 나갔는지, 괜히 자기 때문이라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세상에.

당근이 중고 거래만 하는 곳인 줄 알았더니 사람도 만난다.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시대다.
예전 같으면 평생 스쳐 지나갔을 동네 사람들이 핸드폰 속 작은 채팅방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고 속 이야기를 한다.

 

현대 문명은 사람을 멀어지게만 하는 줄 알았는데, 가끔은 이런 뜻밖의 인연도 만든다.

 

그 언니와 나는 두달 전 이름도 모른 채 ‘오육십대 여자들 당근방’에서 처음 만난 사이다.

 

처음엔 화기애애했던 방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며 조금 답답해졌다.
방장님의 독단적인 운영에 사람들이 하나둘 지쳐 나왔고, 결국 그 순한 언니도 방을 나와 새 당근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를 초대했다.

 

언니는 참 착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착한 사람들이 사람 일엔 더 마음을 많이 쓴다.

 

누가 방을 나가도 내 탓 같고, 분위기 어색해질까 봐 혼자 끙끙 앓는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언니, 이거 회비 받는 학원 아니잖아요.
당근방은 그냥 물흐르듯 가는 거예요.
왔다가 가기도 하고, 잠깐 스쳐 가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이상하게 결이 맞는 사람들만 남아요.”

 

생각해 보면 사람 관계도 비슷하다.

 

억지로 붙잡는다고 남는 것도 아니고,
별 기대 없이 스쳐 갔는데 오래 가는 인연도 있다.

 

결국 시간 지나고 나면
마음 편한 사람 몇 곁에 남는 것 같다.

 

그리고 저녁엔 조금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

 

미리 예매해 두었던 국립오페라단의 <잔니 스키키> 공연.

인천 중구 문화회관 2층 공연장

 

코미디 오페라라길래 가볍게 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고난도 예술이었다.

 

무대를 봐야 하고,
자막을 읽어야 하고,
노래까지 들어야 한다.


눈과 귀, 그리고 집중력을 동시에 요구한다.

 

오페라는 사랑 이야기 하나 하는 데도 몇 분씩 노래를 부른다.

현실이면 이미 헤어졌을 시간인데 오페라에선 아직 1절도 안 끝났다. ㅋㅋ

 

감정은 크고, 몸짓은 더 크다.

게다가 오페라 가수들은 굳이 날씬한 몸을 유지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건 좀 부러웠다.

어쩌면 여자 주인공이 굳이 마른 몸이어야 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예술 장르가 오페라인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풍성한 체격에서 나오는 성량과 존재감이 무대를 꽉 채운다.
현실에선 늘 날씬함을 요구받는 여자들도, 오페라 무대에선 목소리 하나로 압도한다.

 

사실 <잔니 스키키> 내용 자체는 꽤 현실적이다.

죽은 부자의 유산이 수도원으로 넘어갈까 봐 친척들이 잔니 스키키를 불러 죽은 사람인 척 연기하게 하고,
공증인까지 속여 유언장을 새로 쓰게 만든다.

그런데 정작 잔니 스키키는 좋은 재산을 슬쩍 자기 앞으로  돌려버린다.

 

결국 인간 욕심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극인데,

이걸 또 전부 이탈리아어로 들으니 괜히 철학처럼 느껴진다.

사실 알아들었으면 덜 철학적이었을 수도 있다.

 

특히 유명한 아리아

<O mio babbino caro〉가 흐를 땐 숨을 죽였다.

 

가사는 알고 보면 꽤 귀엽다.

 

“아빠, 저 남자랑 결혼 안 시켜주면 강물에 뛰어들 거예요.”

 

사실상 귀여운 협박인데,

멜로디는 세상 가장 순수하고 애절하다.

 

음악은 참 이상하다.
내용보다 먼저 마음을 흔든다.

 

물론 공연 전체가 예술의전당에서 느꼈던 깊은 울림까지 가진 건 아니었다.
감동이 문턱까지 왔다가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 멈춘 느낌.

 

아마 공연장 음향 차이도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쉬움이 오히려 묘한 불씨를 남겼다.

 

언젠가 이탈리아 현지 극장에서 오페라를 한번 제대로 보고 싶다는 생각.

그러려면 이탈리아어도 조금 배워야 하나 싶고.

주식에 뛰어들 나이에
나는 갑자기 푸치니와 이탈리아어에 꽂혔다. ㅎㅎ

 

그런데 뭐 어떤가.
이제 내 시간의 주인은 오롯이 나인데.

 

은퇴전에는 은퇴하면 시간이 남아돌아 심심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이 와 보니 늦게 생기는 취향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예전엔 무심히 지나쳤던 오페라,
낯선 언어,
그리고 당근방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까지.

 

물론 아직은 무언가를 열심히 시작할 마음까지는 아니다.

 

올해 정도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느슨하게 살아볼 생각이다.

 

실컷 걷고,

공연 보고,

사람 만나고,

늦잠도 자면서.

 

그러다 보면 또 어느 날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것이 생기겠지.

 

요즘은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인생은 끝나는 게 아니라
나이마다 조금씩 다른 취향으로 흘러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