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남이섬에 가본 적이 없었다. 문득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 남이섬 한번 가보고 싶어." 그러면 남편은 늘 무덤덤하게 말했다.
"친일파 개인 섬인데, 거기 뭐 볼 게 있다고 그러냐."
남편은 늘 그런 식이었다. 나는 역사 이야기는 잘 모르겠고, 그냥 한번 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 말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 접어둔 채 한 번도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이섬'은 늘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전영록과 이미영이 출연했던 영화를 보았다. 남이섬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는데, 그때는 두 사람이 실제로도 예쁘게 사랑하던 시절이었다. 영화 속 전영록은 눈부시게 반짝였고, 이미영은 참 예뻤다. 그 시절 두 사람의 청춘도, 남이섬의 풍경도 모두 빛나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영화 내용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두 사람의 반짝이던 모습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래서인지 남이섬은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로망 같은 곳이었다. 이후 드라마 〈겨울연가〉가 남이섬을 전국적인 관광지로 만들었을 때도 나는 끝내 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며칠 전에 드디어 당근방의 좋은 언니들과 함께 남이섬을 찾게 되었다.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순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내가 드디어 여기에 와보는구나.'
초록이 짙어진 숲길을 걷고, 싱그러운 나무 그늘 아래서 사진을 찍고,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왜 사람들이 그토록 남이섬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에서는 처음 나온 분들이 계셔서 서로 닉네임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부터 웃음 폭탄이 터졌다.
'샤방샤방' 언니가 닉네임을 소개하다가 실수로 "샤브샤브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 그 말을 들은 하루 언니는 하루 종일 샤방샤방 언니를 "찌개다시야~"라고 부르셨다. 샤브샤브와 찌개다시는 세트라는 유쾌한 언니표 논리였다.
여기에 '수선화' 언니가 "수선화에서 '수'를 빼면 선화예요"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는데도 하루 언니는 계속 "선영아~"를 외치셨다. 선화와 선영 사이 어딘가에서 귀엽게 헤매신 하루 언니 덕분에 남이섬의 아름다운 숲길보다 언니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마음속에 더 오래 남는다.
그런데 이날 가장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자기소개를 하던 중 한 언니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남이섬만 여덟 번 왔어."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니, 남이섬을 그렇게 많이요?"
그러자 언니는 너무도 태연하게 대답했다. "남자친구가 바뀔 때마다 처음 와 본 척하고 또 왔지."
순간 테이블이 뒤집어질 만큼 웃음이 터졌다. 생각해 보니 그 언니에게 남이섬은 관광지가 아니라 연애 연대기였다. 새로운 인연이 생길 때마다 "어머, 저 남이섬 처음 와 봐요." 하며 순수한 표정으로 배를 탔을 언니를 상상하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 언니가 누구인지는 비밀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궁금해 죽는다 ㅋ 해도 나는 끝까지 입을 다물 생각이다.
여행은 풍경도 좋지만 결국 '사람'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꼈다.
식사 후에는 '작은 유럽'이라 불리는 제이드가든으로 이동했다. 정원 하나하나에 정성과 손길이 가득 느껴지는 곳으로, 가드닝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무척 좋아할 만한 공간이었다.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앞서 둘러본 남이섬의 여운이 워낙 컸던 탓인지 기대만큼 마음에 깊이 와닿지는 않았다. 가을에 오면 정말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솔직히 "가을에는 어디든 안 예쁜 곳이 있을까?" 싶어 혼자 웃었다.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가보았던 '라드라비'의 이국적이고, 세련된 건물 분위기가 조금 더 내 취향이었나 보다. 반나절쯤 천천히 머물며 둘러보면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겠지만, 남이섬을 한참 걷고 난 뒤 찾기에는 무언가 2% 부족했다. 아마도 남이섬의 여운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이날은 유독 비교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 코스는 북한강변의 유명한 '대너리스' 카페였다. 주말에는 자리가 없어 발길을 돌리기 일쑤고, 평일 오후에도 웨이팅이 있다는 핫플레이스인데, 우리가 도착한 늦은 오후에는 다행히 자리가 남아 있었다.

대너리스는 그야말로 '담쟁이'가 다 하는 곳이었다. 건물 전체를 푸른 담쟁이덩굴이 감싸고 있어 마치 유럽의 오래된 성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였다. 담쟁이가 건물을 덮고 있다기보다,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원처럼 느껴졌달까. 담쟁이성과 잔잔한 북한강 풍경이 어우러져 카페 전체가 하나의 액자 같았다.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행의 여운을 즐기다 보니 시간도 금세 흘렀다. 돌아오는 길에는 차도 크게 막히지 않아 풍경도 만끽하고 교통체증도 피한, 일거양득의 하루였다.
전영록과 이미영의 반짝이던 청춘을 보며 남이섬을 동경하던 단발머리 소녀는 어느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 시절에는 사랑이 설렜고, 여행지가 설렜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아름다운 풍경도 좋지만 함께 웃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을 것은 아마도 언니들의 웃음소리일 것이다.
샤브샤브가 되고, 찌개다시가 되고, 선화가 선영이 되어 버렸던 그날의 유쾌한 소동들. 생각해 보면 여행의 진짜 풍경은 나무도 꽃도 아닌 사람이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아진 지금. 이제는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미루지 말고 가고,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만나야겠다.
언젠가 더 나이가 들어 기억이 희미해지는 날이 와도, 남이섬의 숲길보다 "찌개다시야~" 하고 부르던 하루 언니의 목소리가 먼저 떠오를 것 같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배꼽을 잡고 웃던 언니들의 얼굴도 함께.
그날 남이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풍경은 숲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 이번 여행 비용:
남이섬 왕복 배삯과 입장료를 합해 19,000원, 제이드가든 입장료 11,000원, 대너리스에서 마신 음료는 8천~9천 원대였다. 솔직히 음료 가격은 조금 비싸다고 느껴졌지만, 맛도 좋았고 북한강과 담쟁이 풍경값까지 포함이라 생각하니 충분히 납득이 갔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웃고 걷고 이야기 나누며 보낸 하루의 행복을 생각하면, 그리 아깝지 않은 지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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