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하면 한없이 한가할 줄 알았다.
늦잠도 실컷 자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창밖도 멍하니 바라보고, 심심해지면 동네 한 바퀴 슬슬 걷는 평화로운 삶. 내가 상상한 은퇴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은퇴 1년 차인 지금, 나의 현실은 상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어제는 진천. 오늘은 원주.
내일은 당근방 사람들과 카페 오픈런. 모레는 친구와 점심 약속까지.
이 정도면 은퇴가 아니라 스케줄러와 동거하는 수준이다.
요즘 내가 주변에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 있다.
"저 지금 백수 과로사 중입니다."
어제는 내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진천을 다녀 왔지만 오늘은 지인 셋과 함께 원주 여행을 떠났다. 다행히 오늘은 내가 운전하지 않았다.
남의 차 조수석에 앉는 순간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리는 비행기 일등석이 아니라 남의 차 조수석이라는 것을. 덕분에 출발부터 기분이 좋았다.
첫 목적지는 소금산 그랜드밸리.
얼마 전 혼자서 호젓하게 와 본 적이 있는 곳인데, 역시 여행은 함께해야 제맛이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힘든 계단 길에서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혼자일 때보다 체력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훨씬 수월하게 느껴졌다.
혼자 왔을 때보다 덜 힘들고 더 즐거웠다.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혼자 여행할 때는 셀카 밖에 남길 수 없었는 데, 함께 오니 마음껏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 소금산 그랜드밸리 이용 팁
- 입장권: 1인 18,000원 (케이블카 포함)
- 코스: 출렁다리 ➡️ 잔도길 ➡️ 울렁다리
- 예전에는 출렁다리만 보고 험한 길을 내려와야 했는데, 지금은 케이블카와 에스컬레이터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체력 부담이 확 줄었다.




"한 장만 더 찍어 줘."
"이번에는 다리 길어 보이게."
"아니, 아까 사진이 더 예쁜데?"
이런 시답잖은 대화와 깔깔거림마저 여행의 소중한 조각이 된다.
이어서 오랫동안 마음속 버킷리스트에 담아두었던 뮤지엄산(Museum SAN)으로 향했다. 한솔그룹이 오랜 시간 공들여 가꾼 문화공간답게, 압도적인 부지와 수준 높은 건축, 정갈한 조경을 마주하니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찬사하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기본 입장권을 구입했다고 해서 모든 공간을 관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전시관, 명상관, 일부 전시도 별도 요금을 내야 한다.
처음엔 티켓 가격이 조금 비싼가 싶었지만,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거대한 부지와 정교한 건축물, 그리고 계절마다 관리되는 조경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들 터다. 문화와 예술 역시 결국은 자본과 정성이 지속적으로 뒷받침되어야 꽃을 피우는 법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지엄산이 깊은 여운을 남긴 이유는 전시 콘텐츠보다 '공간 자체'가 주는 힘 때문이었다. 사실 전시는 기대했던 것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건축은 완전히 달랐다.
세계적인 거장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었다. 노출콘크리트와 잔잔한 물, 그리고 쏟아져 내리는 빛이 만들어 내는 특유의 아우라는 사진이나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주었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 속에서 자신만의 경이로운 세계를 구축했다면, 안도 다다오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불필요한 장식을 최대한 덜어내고 거친 콘크리트와 빛, 물, 그리고 오직 자연만으로 공간을 완성한다.
처음에는 "이 밋밋하고 단순한 건축물이 왜 이토록 유명할까?" 싶었는데 공간 속에 직접 발을 디뎌보니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자기 자신을 뽐내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몸을 낮춰 주변의 자연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 건축물이 풍경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뮤지엄산이 딱 그랬다. 산자락에 묵직하게 놓인 단순한 콘크리트 건축물이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자연과 어우러지며 매번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봄에는 싱그러운 연둣빛 신록과, 여름에는 짙고 푸른 녹음과, 가을에는 타오르는 붉은 단풍과, 겨울에는 모든 것을 덮는 새하얀 눈과 함께 매 순간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날 것만 같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가만히 다짐했다. '여기는 사계절의 얼굴을 보러 꼭 다시 와야겠다.'
유명한 빨간 조형물 앞에서 사진도 찍고, 탐스러운 초록 사과 조형물도 구경했다.


오롯이 감성에 집중할 수 있었던 건, 마음이 맞는 여자들끼리의 여행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와, 이 공간 정말 경이롭다." "여기 빛 들어오는 각도 좀 봐, 너무 예쁘다." "그냥 여기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힐링이네."



만약 남편과 함께 왔다면 어땠을까. 넌지시 상상해 보며 혼자 속으로 웃었다. 아마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이런 대화가 오갔을지도 모른다. "여기 뭐가 그렇게 볼 게 있다는 거야?" 남편과 왔다면 감상 포인트가 달랐을 것이다. 나는 건축과 공간을 보는데, 남편은 입장료부터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오늘 함께한 지인들은 나보다 더 공간의 여백을 즐기고, 풍경의 미학을 온전히 누릴 줄 아는 이들이었다. 덕분에 나 역시 오랫동안 궁금했던 공간을 아쉬움 없이 흠뻑 만끽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은퇴 후 맞이한 삶에서 가장 좋은 점은 '더 이상 미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혹은 함께 발맞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쉽게 포기하고 미뤄두었던 장소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하나씩 발도장을 찍으며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채워가고 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가고 싶은 곳에 기꺼이 가며, 먹고 싶은 것을 즐기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
내일 아침에는 또 당근방 멤버들과의 신나는 카페 오픈런이 기다리고 있다. 빵 다섯개와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단돈 만원이라는 모닝세트를 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 줄을 서는 소소한 재미.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선물해 주신 자유를 삶의 행간마다 조금씩 누리며 사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지금 내 삶의 밀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은퇴했는데, 직장인 시절보다 더 바쁘다."
주변에서 농담 삼아 '백수 과로사'를 조심하라고 하지만, 가만히 짚어보니 일하다 과로사한 사람은 봤어도 즐겁게 놀다가 과로사한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도 또 가벼운 발걸음을 나서보려 한다. 인생의 오후를 이렇게 신나게 놀다 지쳐 쓰러져 죽은 사람은 아직 없으니까!
오늘도 참 알차고 여여(如如)한 하루였다. 😊
📌 원주 여행 정보
✔️ 소금산 그랜드밸리 입장권(케이블카 포함) : 18,000원
✔️ 뮤지엄산 기본 입장권 : 23,000원
✔️ 소금산 그랜드밸리 주차장 : 무료
✔️ 뮤지엄산 주차장 : 무료
✔️ 소금산 그랜드밸리 ↔ 뮤지엄산 : 차량 약 20분
자연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소금산 그랜드밸리와 건축·예술을 만날 수 있는 뮤지엄산을 함께 둘러보면 원주 당일치기 여행 코스로 손색이 없다.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남이섬 당일치기 | 처음 가 본 남이섬, 가장 기억에 남은 건 풍경이 아니었다. (2) | 2026.06.18 |
|---|---|
| 진천 가볼만한 곳 | 농다리·미르309·보탑사·배티성지 당일치기 코스 후기 (0) | 2026.06.11 |
| 영종도 1박2일 여행코스 추천 | 선녀바위·소무의도·예단포 둘레길 후기 (4) | 2026.06.03 |
| 강화도 김포 당일치기 코스 추천 | 마호가니 카페부터 애기봉까지 (5) | 2026.05.28 |
| 부천 백만송이 장미원 나들이 | 도당동 장미공원 주차 꿀팁 (6) | 2026.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