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혼자였다.
비가 보슬보슬 흩날리던 오후, 괜히 마음이 몽글해졌다.
아무런 약속도 계획도 없이, “지금 가야 해!” 하는 마음에 이끌려 부천 백만송이장미원으로 향했다.
빗방울을 머금은 장미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오롯이 나만의 ‘비 감성’에 흠뻑 취했던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정확히 24시간 만에 나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그곳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지역 모임인 ‘당근 여자 여행 모임’ 사람들과 함께였다.
장미가 절정인 계절답게 공원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주차장은 그야말로 치열한 눈치 게임 전쟁터. 결국 일찌감치 포기하고 도당도서관 앞에 차를 세운 뒤 걸어갔다.
멀리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몇 번 만나며 정이 든 얼굴들도 있었고, 오늘 처음 만나는 새로운 얼굴들도 있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이 무려 열여섯 명.
“세상에, 이렇게 많이 오셨다고요?”

속으로 눈이 번쩍 뜨였다.
퇴직 전에는 학교라는 울타리 안의 인간관계가 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매일 보던 동료들, 해마다 새롭게 만나는 학생들이 내 인연의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은퇴 후에는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웃고 이야기하며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니.
참 신기하고도 설레는 일이다.


당근모임 사람들은 묘하게 편안하다.
서로 적당히 긴장하고, 적당히 잘 보이려 애쓰며, 또 적당한 선에서 친절하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너무 차갑지도 않은 그 적당한 거리감이 오히려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준다. 게다가 비슷한 동네에 살아 언제든 다시 마주칠 수 있다는 점도 묘한 안정감을 준다.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사진 찍어드릴까요?” “천천히 걸어요.” “여기 장미 진짜 예뻐요.”
별것 아닌 한마디들이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중년의 친절은 젊을 때와는 조금 다르다.
상대를 함부로 넘지 않으면서도, 필요한 만큼은 다정하다.
게다가 직접 만나 보니 또 재미있는 반전도 있었다.
채팅방에서는 그냥 편안한 동네 아줌마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의외로 소녀처럼 귀엽고 순수한 매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글에서는 조용해 보였는데 막상 만나니 분위기를 빵빵 터뜨리는 유쾌한 언니도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단톡방에서는 무심한 말투였는데 실제로는 가장 먼저 사람들을 챙기며
“거기 계단 조심하세요.” “사진 예쁘게 나왔어요!” 하며 다정하게 웃어 주었다.
신기했다.
우리는 서로의 직업도, 살아온 사연도 완벽히 알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함께 장미를 보고 웃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처럼 편안해진다.
향긋한 꽃향기에 취하고,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취해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모임의 인기 뒤에는 현대인의 외로움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외롭고, 너도 외롭다.'
우리 또래의 여자들은 이제 조금씩 서로의 인생에서 멀어지는 시간을 살아간다.
아이들은 제 삶으로 독립해 나가고, 친구들은 각자의 사정 속에서 바빠진다. 퇴직 후에는 직장이라는 울타리마저 사라진다. 그러다 보면 문득 하루가 조용해지고, 누군가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래서일까.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장미꽃 아래를 걷고, 별것 아닌 이야기로 웃는 이런 시간이 생각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런 모임은, 현대를 살아가는 중년 여자들의 새로운 공동체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뿔싸. 내 선글라스랑 셀카봉 리모컨이 어디 갔지?’ 😅
모임이 한창 무르익을 즈음 다시 도당도서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아까 걸어왔던 길인데, 네이버 지도 없이도 가뿐하지!”
당당하게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쏙 넣고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 뒤, 나는 완벽하게 길을 잃었다.
(ㅋㅋㅋ)
분명 아까 걸었던 골목 같은데 자꾸 낯선 간판이 튀어나왔고, 걸으면 걸을수록 낯선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혼자 도당동 골목길을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만약에 전에 다니던 학교 학생들이 이 모습을 봤다면 정말 재밌어들 했을 거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학년부장 시절 현장체험학습만 가면 맨 앞에서 나침반처럼 길을 찾고 수백 명의 아이들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던 사람이 아니던가.
“뒤처지는 사람 없지? 여기야. 여기서 내려야 해.”
늘 그렇게 외치던 학년부장.
학교에서는 늘 맨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사람이었는데, 정작 오늘은 주택가 한복판에서 혼자 빙글빙글 헤매고 있다니.
결국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항복 선언을 했다.
슬그머니 네이버 길찾기 앱을 켰고, 인공지능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겨우 무사히 차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왜 이렇게 덜렁대냐”며 스스로를 자책했을 텐데, 길을 잃고 헤맨 그 모든 순간이 이상하게 너무 재미있었다.
늘 긴장하며 남을 챙기고 책임져야 했던 자리에서 잠시 벗어나, 낯설고 서툰 상황 속에 툭 던져지니 오히려 ‘내가 진짜 살아 있구나’ 하는 생동감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은퇴 후의 삶은 꼭 ‘인생 새내기’ 같다.
평생 늘 긴장하고 완벽해야 하는 자리에서 살다가, 이제야 비로소 처음 가보는 길을 걷고 마음껏 엉뚱한 실수도 저질러 본다.
하지만 이런 빈틈과 서툼 덕분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내 삶의 결이 다시 조금씩 부드럽고 유연해지는 것 같다.


다시 보니 장미공원의 꽃들도 벌써 조금씩 저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터질 듯 피어 있던 화려한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하나둘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은 없듯, 아무리 눈부신 꽃도 영원히 피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장미는 피어 있는 순간만큼은 온 힘을 다해 가장 짙은 향기를 뿜어내고, 지는 순간마저도 구차하지 않고 당당하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치열하게 피어났던 날들을 지나,
지는 순간까지도 저 장미처럼 우아하고 당당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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