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 남한강 출렁다리 ·세종대왕릉 · 라드라비
얼마 전, 혼자 조용히 여주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의 여주는 감성 그 자체였다. 남한강은 느릿느릿 흘렀고, 신륵사의 고요함과 600년 된 은행나무에 빼곡히 매달린 소원지는 종교를 떠나 마음까지 차분하게 만들었다. 혼자라서 오히려 바람 한 줄기, 풍경 하나까지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여행은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그런 여주를 이번엔 지인들과 다시 찾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
오늘의 코스는
신륵사 ➡️ 남한강 출렁다리 ➡️ 세종대왕릉 ➡️ 이천 라드라비 카페.
💬 경치보다 웃음소리가 더 크게 남은 여행
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깨달았다. 같은 장소인데 기억에 남는 건 풍경보다 사람이라는 걸.
차 안에서부터 시작된 수다는 길 위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아이큐 세 자리는 여기 없지? ㅋㅋ”
셀프 디스에 서로 저격하기까지, 끊임없이 웃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 치트키 주제… 바로 남편 이야기. 🤣 다리가 흔들려서 심장이 떨리는 건지, 남편 이야기에 화가 나서 떨리는 건지 분간이 안 갈 때쯤 누군가 먼저 운을 뗐다.






“남편이 오늘 저녁도 먹고 들어오냐고 묻더라.”
“나도! 그래서 밥통에 밥 많다고 했어.”
“우리 남편은 집에 먹을 게 없대. 냉장고 꽉 찼는데.”
“찾기 싫은 거지, 찾으면 자기가 해야 하니까.” 😂
이 한마디에 전원 박장대소했다. 다리가 출렁거리는 건지, 우리가 웃어서 흔들리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웃느라 정작 여주의 감성적인 풍경들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게 함정이었다. 역시 여자 넷이 모이면 천하무적이다.




🍘 여자들 여행엔 끝없는 주전부리가 따라온다
여자들끼리 여행에 빠질 수 없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주전부리다.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방에서 계속 뭔가가 나왔다. 밤식빵, 마른 오징어, 커피 사탕, 떡까지.
“이거 먹어 봐요.”
“언니, 이것도 맛있어요.”
차 안은 어느새 이동식 매점이 되어 있었다. 분명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입은 쉬지 않았다. 😂
그중 한 언니는 정말 인생을 유머와 통찰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빵빵 터졌는데, 웃기기만 한 게 아니라 묘하게 삶의 철학이 담겨 있었다. 딸 하나를 키우며 딸의 초·중·고 시절 내내 학교 체육진흥회 회장을 맡아 여러 학부모 단체를 이끌어 오신 분이라 그런지, 말에도 묘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난 늙고 병들어서 오래 사는 게 진짜 싫어. 칠십까지만 살고 싶어.”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먹고 싶은 건 다 먹고 살아.”
비싼 복숭아도 마음껏 사 먹고, 한우도 마음껏 먹고, 여행도 마음껏 다니다 보니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남들은 “자식도 하나밖에 안 길렀는데 왜 이렇게 못 사냐”고들 했다며 깔깔 웃으셨다.
이상하게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나도 이왕 못 사는 거, ㅋㅋ 먹고 싶은 거 잘 먹고, 가고 싶은 데 잘 다니면서 살아야겠다. 앞으로는 그 언니를 롤모델 삼아 살아 보기로 했다.😊
점심은 신륵사 바로 앞 '산너머 남촌'.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인당 1만 5천 원이면 솔직히 큰 기대 안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상이 나오자마자 우리 테이블 분위기는 순식간에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을 방문한 식객들로 돌변했다.

“요즘 만오천 원이면 집에서는 반찬 한두 개 만들기도 힘들지 않아?” “도대체 반찬이 몇 가지야?”
“언니, 이거 맛있어요! 사장님, 이것 좀 더 주세요.”
서로 젓가락을 들이밀고,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고, 누군가 한마디 던지면 다 같이 빵 터졌다. 조용한 한정식집이었는데 우리 테이블만 유독 떠들썩했다.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
그런데 신기하게도, 밥상 위 반찬 이야기는 어느 틈에 '집에서 밥 차려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남편' 이야기로 흘러가는 데는 채 30초도 안 걸렸다. 역시 여자들의 수다 본능이란 대단하다.
🎨 남편과 왔을 때와는 달랐던 ‘라드라비’
그렇게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다. 마지막 코스는 이천 라드라비.
사실 이곳엔 사연이 있다. 헤어 디자이너로 평생을 살아온 부부가 은퇴 후 이천의 산을 통째로 사서, 바위 하나 깎지 않고 그 자연 위에 공간을 얹었다. 직접 그린 연필화로 미술관을 채우고, 카페와 스테이, 한식 레스토랑까지 갖춘 복합문화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주변에선 “골프나 치지, 왜 이런 걸 하냐”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길을 걸어간 부부. 솔직히 부럽지 않으면 거짓말이다.
그리고 라드라비(LA D RAVI)’라는 이름도 참 인상적이다.
프랑스어 감성을 담아 ‘인생의 예술’ 같은 삶의 태도를 표현한 이름이라고 한다.
남들이 보기엔 비효율적이고 고생스러운 선택처럼 보일지 몰라도,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낸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 공간에 앉아 있으니 괜히 마음 한쪽이 몽글몽글해졌다.
아… 인생은 결국 이렇게 자기 방식대로 아름답게 살아내는 거구나 싶었다. 😊
그 공간에 와서 숨을 쉬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복이지 싶었다.
사실 예전에 남편과 함께 왔을 때 반응은 이랬다.
"이 골짜기까지 와서 볼 것도 없구만, 이딴 걸 왜 보러 와?"
그때 남편은 풍경보다 “언제 돌아 가냐”에 더 관심 있었고, 우리는 풍경 하나에도 호들갑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와… 여기 진짜 너무 좋다.”
"우리 가을에 다시 오자.”
“가족들이랑도 꼭 오고 싶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셔터를 눌렀고, 꽃 하나, 바위 하나에도 진심으로 감탄했다. 남편과의 반응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역시 이 맛에 여자들끼리 여행을 다니는 거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
🌿 결국 여행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같은 장소도 누구와 가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여행이 된다는 걸 오늘 다시 실감했다. 혼자 갔던 여주가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는 여행이었다면, 오늘의 여주는 사람 냄새와 웃음소리로 가득 찬 여행이었다.
남편 흉에 셀프 디스까지 총동원해 깔깔댄 하루였지만, 그 어떤 감성 힐링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개운했다.
두 여행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완벽했다. 혼자였던 여주의 바람도 좋았지만, 감성적인 풍경 사이로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오늘의 여주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마 여행은 장소보다 결국 함께 걷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 Epilogue.
남편, 이렇게 밖에서 실컷 씹혀야 네가 이혼을 안 당하는 거란다. 🤣 그동안 쌓인 게 있으니까 이 정도는 감수하시길. ㅋㅋ 내가 밖에서 스트레스를 다 풀고 가니까 안 쫓아내고 살아 주는 거야. 여기까지 그냥 저냥 살아 왔으니, 남은 인생도 의리와 정으로 지지고 볶고 다시 살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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