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역시 밥심이지.”
결국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복선은 이미 아침 8시, 부천 상동역을 출발할 때부터 깔려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목적지는 대전. 이유는 단 하나, ‘빵’이라는 밀가루 성배를 영접하기 위해서였다. 🍞

생각해 보면 참 근사하게 대책 없는 소동이다. 생애 첫 ‘빵 투어’라니. 그것도 환갑 또래 여자 넷이서 말이다.
평소의 나라면 “빵 사러 대전까지 가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하며 손사래부터 쳤을 테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비효율이 마음에 들었다. 평생 ‘해야 하는 일’과 ‘효율’이라는 자로만 일상을 재단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이런 쓸데없는 모험을 즐겨도 될 것 같았다.
왕복 여섯 시간의 고속도로. 휴게소 한 번 안 들르고 거의 돌진하듯 내려갔다. 성심당 오픈런이라는 목표 앞에서 다들 눈빛이 꽤 진지했다.
그러다 뒷좌석에서 누군가 툭 던졌다.
“우리 지금 빵 사러 왕복 400킬로미터 달리는 거 맞지?”
그 말에 차 안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그래, 맞다. 참 어이없는 짓이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재밌었다. 목적지보다 더 좋았던 건, 그 비합리적인 여정을 함께 낄낄거리며 달려가는 시간 자체였다.
성심당, 그리고 집게를 든 전사들
오전 11시, 성심당 본점 앞은 이미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알았다. 여긴 그냥 빵집이 아니었다. 거의 전장이었다.

📍 성심당 본점은 대전역 근처 은행동에 있다. 바로 옆엔 성심당 문화원과 케익부띠끄도 함께 붙어 있다. 평일인데도 이미 줄이 길었다.


갓 구운 빵 냄새와 사람들 열기로 매장 공기가 후끈했다. 튀김소보로, 부추빵, 명란바게트…. 사람들은 집게를 든 채 무서운 집중력으로 트레이를 채우고 있었다.


우리 넷도 순식간에 그 흐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거 지금 집어야 돼요!”
“빨리 담아요! 없어져요!”
“어머, 그거 내 것도 하나 담아줘요!”


그러다 문득 주변을 봤는데, 파릇파릇한 MZ세대 틈에서 ' 인천·부천 아줌마 부대 '가 눈빛을 번뜩이며 집게를 창처럼 휘두르는 모습이라니. 바로 우리였다. 빵을 사수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진심으로 우리 기세가 얼마나 살벌했던지, 그 순간만큼은 전국 빵지순례 최강팀 같았다.
그 와중에도 다들 표정은 진지했다. 사람은 왜 줄만 서 있으면 갑자기 승부욕이 생기는 걸까.
양손 가득 빵 봉지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을 땐, 꼭 전리품 챙긴 개선장군들 같았다.

로컬의 고집, 그리고 K-DNA의 반란
창밖을 내려다보니 대전 시내가 온통 성심당 노란 봉투로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다. 요즘은 다 서울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성심당은 반대로 사람들을 대전으로 내려오게 만든다. 수도권으로 가지 않고 “빵 먹으려면 대전으로 오세요” 하는 식의 그 고집도 묘하게 멋있었다. 진짜 대전 경제에 성심당 지분 꽤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수도권에 지점 내었으면 누가 왕복 여섯 시간을 달려왔겠는가. ㅋ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튀소 한 입, 부추빵 두 입쯤 먹고 나니 혈관 속 어디선가 오래 잠들어 있던 K-DNA가 슬금슬금 깨어나기 시작했다.
‘느끼하다…. 된장 냄새 맡고 싶다.’
결국 우리 넷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안 되겠는데요? 보리밥 먹으러 가야겠어요.”
빵의 성지에서 결국 보리밥을 외치다
그 길로 달려간 보리밥집.
갖은 나물에 고추장과 된장을 넣고 쓱쓱 비벼 한 술 크게 떠먹는 순간, 다들 동시에 말했다.
“그래, 이 맛이지!”



📍 우리가 간 곳은 유성 근처 송은정 보리밥. 보리밥 정식은 1인 15,000원이었는데, 셀프바가 있어 반찬도 계속 리필이 되었다. 더치페이식 카드 결제도 가능해서 환갑 또래 여자 넷의 더치페이도 아주 평화롭게 끝났다.
신기하게도 그 한 입이 성심당 빵보다 더 깊이 마음에 들어왔다. 이미 빵으로 배는 불렀는데, 보리밥은 이상하게 마음까지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먹던 옥수수빵 생각도 났다. 원조 물자로 받던 투박하고 퍽퍽한 빵. 맛있다기보다는 그냥 그 시절 냄새 같은 것.
그래서인지 요즘 유행하는 화려한 빵보다 된장 냄새 나는 보리밥에 더 안도하게 되는 건, 결국 사람이 나이 들수록 자기 몸에 익은 위로를 찾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식이라는 것도 어쩌면 거창한 게 아니라, 마음속 기억을 다시 꺼내 먹는 일에 가까운 건 아닐까.
입장료 무료, 주차비 무료의 한밭수목원 산책
배를 든든히 채우고 찾은 한밭수목원은 완벽한 휴식이었다.

📍 한밭수목원은 입장료 무료, 주차 3시간 무료라 부담 없이 걷기 좋았다. 동원과 열대식물원은 월요일 휴관, 서원은 화요일 휴관. 도심 한가운데인데도 규모가 꽤 커서 천천히 걷다 보면 여행 마무리 산책 코스로 딱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꽃들이었다. 수도권보다 계절이 조금 앞서 있는 느낌이었다. 수도권에서는 아직 망설이듯 피어 있던 꽃들이 여기선 한껏 만개해 있었다. 모란도, 작약도, 데이지도, 장미까지…. 꽃들이 마치 “우린 이미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들어왔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걷다 보니 괜히 마음까지 느슨하게 풀어졌다.
꽃은 늘 비슷한데, 사람 마음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인다. 오늘의 꽃들은 유난히 환하고 다정했다.

“대전에 살면 여기 자주 오게 될 것 같아요.”



누군가 진심으로 말하자 또 누군가 바로 받아쳤다.
“근데, 여기 살았으면 성심당 줄 보면서 ‘참 유별나다’ 했을걸요?”
그러고 보면 사람은 늘 먼 곳에 더 설렌다. 가까이 있는 건 당연해지고, 어렵게 닿은 풍경은 오래 기억된다.
빵 사러 왕복 여섯 시간을 달려간 하루.
결국 기억에 남는 건 빵보다도 차 안에서 웃던 시간들이다.
오늘 우리는 빵을 먹으러 대전에 갔다가, 결국 보리밥 한 그릇에 행복해하며 돌아왔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참 단순하다.
멀리까지 설레며 달려가도, 결국 마지막엔 익숙한 맛 앞에서 제일 편안해진다.
아무튼 오늘도 아주 잘 놀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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