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를 몇 년 직접 모셨다.
우리 집으로 오시던 요양보호사 분이 많이 아프셔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결국 엄마를 요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아흔넷, 치매 중증의 엄마.
집에 계실 때는 기력이 참 생생했다.
나보다 더 오래 사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 요양원에 간 지 몇 달 만에
엄마는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그래서 어제, 엄마가 종합병원에 입원했다.
엄마를 떠올리면
어릴 적 기억이 함께 올라온다.
나는 어린이집 종일반 아이였다.
어린이집은
평소에는 아이들을 그냥 집으로 보냈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달랐다.
부모가 데리러 와야만
집에 갈 수 있었다.
그날도 비가 왔다.
아이들은 하나둘씩 이름이 불려 나갔다.
우산을 들고 온 부모 손을 잡고,
금방 사라졌다.
나는 남아 있었다.
열 시가 넘도록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다.
어린이집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고 나서야
그제야,
내가 아직 거기 있다는 걸
알던 집이었다.
그때 엄마가 했던 말이 있다.
“귀찮은데, 종일반에 넣어서 늦게 오게 하자.”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큰오빠는 경주에서 제일 좋다는 유치원을 다녔다.
정오가 되면 마치는 곳이었다.
똑똑했던 큰오빠는
부모님의 자랑이었다.
어릴 때 받은 상장을
한복집에 다 걸어 놓을 정도로,
경주시내에서는 천재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늘 그 뒤에 있는 아이였다.
엄마는 늘 화가 나 있는 사람이었다.
삯바느질로 번 돈을
사람 좋은 아버지는 쉽게 남에게 내어주곤 했다.
몇 번이고
돈을 빌려주고, 맡기고, 잃어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없이 바느질을 하며 버텼다.
그 감정이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내게로 흘러왔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한때
집이 제일 싫었다.
엄마의 신앙도 이해되지 않았다.
차갑고, 때로는 가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신앙은
엄마가 버티기 위해 붙잡고 있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느질을 하면서도
성경 구절을 외우고,
교회에서 그것을 암송하던 엄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통으로 외우던 엄마를 보며
나는 치매라는 것은
엄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믿었다.
스물넷부터였다.
나는 매달 돈을 보냈고,
필요할 때마다 더 보태 드렸다.
한 번은
“내가 엄마한테 준 돈이 몇억은 넘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화를 낸 적도 있다.
그 말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다.
교회는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다니기 어려운 곳처럼 느껴졌고,
어딘가에서
무시당하는 기분,
투명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 같은 순간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멀어졌다.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도
엄마는 한 번도 와 보지 않았고,
김치 한 번 담가 준 적도 없었다.
내 아이들을 봐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엄마를 원망했다.
그런데 지금의 엄마는
그때의 엄마가 아니다.
치매 속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린 채
어린아이처럼
내 마음 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이제는
미워할 수가 없다.
나는 이미 한 번,
강아지 졸리와 피트를 떠나보내며
그 슬픔을 겪어 본 적이 있다.
엄마가 떠난다면
나는 그 슬픔을
다시 겪게 되겠지.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에게 드리던 돈을
엄마는 다시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
그 삶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온 건지
이제야 조금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원망만 남아 있지는 않다.
그래서 오늘은
조용히 기도해 본다.
하나님,
우리 엄마
조금만 더 살게 해 주세요.
딱 일 년만이라도.
그 시간 동안
이젠 원망하지 않고
더 마음 다해
엄마를 위하며 살아보게 해 주세요.
엄마,
조금만 더
내 곁에 있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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