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7시, 상동역. 네 여자가 모였다.
이 시간에 모였다는 건 이미 오늘 하루는 성공이다. 의지력 만렙 찍은 날.
목적지는 제천. 첫 코스는 청풍명월 케이블카. 대인 18,000원. 디지털 관광주민증 있으면 16,000원.
여행의 기본은? 감성도 좋지만, 2천 원 아끼는 것부터 시작이다. ㅋ

케이블카가 떠오르자 세상이 조용히 아래로 내려간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땐 그렇게 높던 것들이 막상 올라와 보니 전부 발밑이다.
사람도, 고민도, 웬만한 건 다 그렇다.
미세먼지가 조금 있었는데도, 청풍호는 이상하게 에메랄드빛이었다.
월악산, 금수산, 소백산 줄기, 주흘산, 악어봉, 그리고 제천시내까지 한번에 다 들어온다.
겹겹이 이어진 산 사이로 물빛이 번지고, 보고 있으면 그냥 가만히 서 있게 된다.
비봉산 정상에 올라서니 사방이 물이다. 내려다 보이는 산들은, 어느순간 섬처럼 보인다.
이럴 땐 다들 비슷하다. 괜히 말이 줄어든다. 설명할 필요 없는 풍경 앞에서는, 굳이 뭔가를 덧붙이고 싶지가 않다.





그대로 내려오기 아쉬워 약초길로 향했다. 531개의 계단. 숫자부터 이미 협박이다. 그런데 여긴 그냥 계단이 아니다.
약초길 파빌리온, 일종의 ‘걷는 놀이터’.




계단 사이마다 문장이 하나씩 붙어 있다. 이게 또 묘하다. 명언 같지도 않고, 농담 같지도 않은 딱 그 중간인 듯 하다.
읽으면 웃기고, 조금 지나면 괜히 생각나는 문장들.
“걷는 것은 명상.” → 내려갈 땐: 맞네…
“젊어서 고생하면 골병든다.” → 올라올 땐: 이건 국룰이다.
“행복은 회사 밖에 있다.” → 반박 불가.
“잠재력 말고 잠과 재력을 따로 주세요.” → 현실 고증 100%.
“운명이 말한다. 왜 그렇게 나한테 다 맡기기만 하냐고.” → 중간쯤에서 뜨끔.

이상한 건, 내려갈 때는 그냥 웃던 문장이 올라올 때는 갑자기 철학이 된다.
숨이 차오르면 사람은 자동으로 겸손 + 사색 모드가 되는 듯 하다.
그래서 이 길은 힘든데 덜 힘들다. 다음 문장이 궁금해서 계속 걷게 된다.
결국 531계단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다리는 무겁고 머리는 맑다.
“걷는 것은 명상.” …억울하지만 인정.
531 계단 오르내리다 결국 뻗음. ㅋ

케이블카를 내려와 점심을 먹고 다음으로 간 곳은 청풍문화유산단지. 입장료 3,000원.










집만 옮겨온 게 아니라 그 안에 살던 시간까지 같이 옮겨온 느낌이다. 높은 정자에 올라 내려다보니 사라진 것과 남아 있는 것이 겹쳐진다. 없어진 게 아니라 자리를 바꾼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들른 곳, ☕ 카페 너른
자리 사이 간격도 넉넉하고, 창은 크게 열려 있다. 사람 보다 바깥이 먼저 들어온다.
정원, 식물, 그리고 그 너머 청풍호까지 시선이 끊기지 않고 그대로 이어진다.
카페인데, 잠깐 머무는 곳이라기보다 조금 쉬었다 가라고 만든 공간 같다.
그래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가자”던 말이 제일 먼저 무너진다. 시간이 슬쩍 늘어진다. 커피도 좋고 차도 좋지만 사실 여기서는 그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풍경을 매일 보는 사람이라면 굳이 더 욕심낼 게 있을까 싶다. 잠깐 앉아 있었을 뿐인데 괜히 마음이 한 톤 내려온다.
여기 주인, 돈보다 방향을 먼저 잘 잡은 사람 같다. 이건...... 좀 부럽다.






마지막 코스는 의림지. 입장료는 무료
안개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하고, 안개라고 하기엔 은근히 젖는 그 애매한 중간.
우산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그냥 맞게 되는 그런 비.






그 비가 의림지에 닿는다. 툭— …아무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비를 맞고 있는데, 저 물은 그냥 받아들인다.
천 년 넘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며 자기 이야기를 내려놓고 갔을까.
그리고 오늘, 우리도 똑같이 한다. “와… 좋다…”
이 말, 아마 천 년 전에도 했을 것이다.
아침 7시에 출발해 저녁 8시에 돌아온 하루.
531계단, 사라진 마을의 시간, 천 년의 물, 그리고 몇 개의 문장과 작은 깨달음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남은 문장 하나 “행복은 회사 밖에 있다.”
이건… 진짜 반박이 안 된다. 잘 걷고, 잘 보고, 웃고, 쉬고, 요즘은 이게 생각보다 꽤 큰 능력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요즘 내가 이렇게 돌아다니는 시간들이 괜히 주어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낼 때는 그저 바쁘고 치열하게만 살다 오라고 한 게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이 풍경들을 천천히 보고, 마음껏 느끼고, 웃으면서 살다 오라고 그렇게 보내신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이렇게 사는 쪽이 더 맞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나, 은퇴 잘했다. 아주 잘했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렇게 멋진 세상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 세상 여기저기 소풍 잘 다니다 지금 왔습니다.” …조금은 진심, 조금은 아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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