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떠나 서해로 달리던 아침, 차창 밖 풍경이 조금씩 달라질 때마다 마음도 함께 풀려갔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 오는 건지, 아니면 내가 그 풍경 속으로 스며드는 건지 잠깐 햇갈릴 만큼.
그래서였을까. 이번 여행은 단순히 ‘보는 시간’이 아니라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에 가까웠다.
첫 번째로 찾은 유기방가옥. 입장료 8,000원이라는 표지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 결국 입구에서 사진만 남기고 돌아섰다. ㅋ (아줌마들 여행에서 입장료는 꽤 중요한 변수니까, 하하.)
그런데 오히려 그 선택이 더 좋았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길,
수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서산 전체가 하나의 꽃밭처럼 느껴졌다.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히 좋았고, 입장료까지 아꼈으니 시작이 꽤 괜찮았다.
가끔은 들어가는 것보다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더 오래 남는 것 같기도 하고.. ㅋ
점심으로 먹은 연잎밥과 곤드레밥 정식은 정갈하면서도 푸짐했다.
반찬 하나하나 정성이 느껴졌고, 음식 잘하는 내 친구 집에 초대받은 듯한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내 그릇의 크기를 알고, 부족하지 않게 채우고, 넘치지 않게 비우는 것.”
많이도 말고, 부족하지도 않게, 그날의 식사도, 여행도 딱 그 정도로 충분했다.
이어 찾은 천리포수목원. 입장료 15,000원이라는 거금 ㅋ 앞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이번에는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어떤 풍경은 가격으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고....
식물들 사이를 걷는 동안 마음은 한 겹씩 풀렸고,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수목원 길은 말없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초록은 눈을 쉬게 하고, 바다는 생각을 비워주었다.
그저 걷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다.
안면암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주차도, 입장도 모두 무료였다.
그런데 풍경은 어떤 유료 관광지보다도 더 깊게 다가왔다.
벚꽃은 만개해 있었고, 그 아래 동백은 이미 지고 있었다. 그 대비가 더 아름다웠다.
해 질 무렵 찾은 꽃지해수욕장. 할매·할배 바위 사이로 해가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빛이 사라지는 걸 보고 있자니 끝이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여행에서는 그런 순간을 자주 만나게 된다.
둘째 날, 풍경은 더 멀어지고 마음은 더 깊어졌다.
고창 청보리밭. 초록 위에 노랑이 얹혀 있었다.
청보리와 유채꽃이 함께 흔들리며 봄이 색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곳에서 뜻밖의 에피소드도 생겼다. KBS 생생정보 촬영팀을 만났다.
잠시 머뭇거리다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보리밭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적 배웠던 보리밭 노래를 조금 흥얼거리기도 하고, 보리밥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보리밥 혼식을 장려하던 시절, 국민학교 어린이였던 나는 보리밥 3: 쌀밥 7의 배율이 당연한 줄 알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는 훨씬 소박하고, 배고팠던 시절이지만 그 기억 덕분에 이 보리밭이 더 깊숙하게 와 닿았는지도 모른다.
천사대교를 건너 처음으로 신안에 들어섰다.
멀고도 먼 섬들, 한때 고립되어 있었던 시간들. 건너와 보니 그 거리와 삶의 무게가 조금은 실감되었다.
그런데도 풍경은 놀라울 만큼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보라색 지붕, 보라 다리, 그리고 보라빛 마을.
보라색 옷을 입고 입장하면 무료라 나 역시 ‘보라돌이’가 되어 들어갔다.
퍼플교를 건너 박지도까지 걸으며 색 속을 천천히 지나갔다.
목포의 밤, 바닷가에서 펼쳐진 레이저 분수쇼. 빛과 물이 어우러지며 조용했던 바다가 잠시 숨을 쉬는 듯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모두 인연법이다. 이만큼이 인연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풍경, 이 마음까지도 모두 그렇게 이어진 인연일지 모른다.
갓바위를 천천히 걸으며 밤공기 속에 마음을 내려놓았다.
마지막 날, 돌아오는 길에 들른 개심사.
청벚꽃과 겹벚꽃이 겹겹이 피어 있었다.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에 만났기에 더 오래 남는 풍경이었다.
여행은 늘 그렇다. 지나온 시간이 쌓여 마지막 장면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는 충분한 계절이 있었고, 그 계절은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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